[ 만추 (Late Autumn), 김태용 감독, 2011년 ]
김태용 감독의 2011년 영화 "만추"를 2024년 10월 가을의 어느날 이제서야 봤습니다.
이 영화 제작하고 나서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는 결혼을 했고, 또 탕웨이는 2011년 5월 백상예술대상에서 외국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 꽤 특별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네요. ㅎㅎ
(* 경고: 여기서부터는 스포 가득한 감상평이니 아직 영화를 안 본 분은 주의하셔요.)
영화 제목 "만추 (Late Autumn)" 에서 느껴지는 첫 인상은 "진하고 깊은 외로움"이예요.
감옥에 혼자 갇혀 있어야 했던 애나, 어머니를 잃은 애나, 집에 왔지만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애나의 싸인에만 관심을 가지는 형제자매 친척들, 애나가 느꼈을 감정이 시애틀의 "만추" 그 자체였을거 같아요.
몇 개 인상 깊었던 장면들 위주로 느꼈던 점 풀어볼께요.
(장면 1) 감옥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어머니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애나
여자주인공 중국인 애나(탕웨이 역)는 남편을 죽였다는 혐의로 감옥에 갇혀있는 2537번의 죄수예요. 어머니의 죽음으로 장례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 동안만 보석으로 풀려났어요.
남자주인공 한국인 훈(현빈 역)은 돈을 받고 여자들의 남자 애인이 되어주는 에스코트예요. 훈은 전 애인의 남편에게 쫒기고 있는 신세예요.
남녀 주인공이 어쩌보면 더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없을만큼 가장 밑바닥의 신세예요.
보통의 인연이 아니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이예요.
(장면 2) 시애틀 놀이공원
애나와 훈 간에 친근감이 싹트고 사랑이 물들어가기 시작한 장면을 꼽으라면 둘이서 시애틀의 놀이공원에 가서 놀던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문닫은 놀이공원에서 둘이서만 범퍼카를 타다가, 동화의 한 장면처럼 무대가 열리고, 애나와 훈 앞에 헤어진 연인인 듯한 두 남녀가 무성영화처럼 옥신각신을 해요. 이때 훈과 애나는 무성영화에 대사를 입히듯 둘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게 돼요.
우리가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소설책을 읽고, 이런게 어찌보면 지금의 내 마음을 투영하고 그래서 공감받고 싶은 바램이 있어서 인가봐요.
* 애나: "난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장면 3) 시애틀 시장
시장에서 애나는 자신이 남편을 살해 한 혐의로 수감 중인 죄수이며, 몇 시간 후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해요. 그리고, 훈이 못알아 듣는 중국어로 왜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를 하지요. 이때 중국어를 모르는 훈은 오직 자신이 아는 중국어인 "하오(좋다)"와 "화이(싫다)"로 생뚱맞게 맞장구를 치면서 애나의 얘기를 들어요. 대화라는게... 뭔가 즉각적인 솔루션을 바라는게 아니라면... 그저 옆에 있으면서 눈을 마주하면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가봐요.
(장면 4) 장례식 후 식사
훈은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꽃을 들고가서 조문을 하고, 애나와 조문객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요.
이때 애나의 이전 남자 친구인 왕징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되죠.
비록 훈은 지난밤 애나가 중국어로 말한 애나와 왕징 간에 있었던 일을 못 알아들었을테지만, 애나와 왕징 간의 어색한 표정을 읽고는 둘이 심상치않은 관계인것을 간파해요.
그리고 훈과 왕징은 서로 몸싸움을 하게 되죠. 얼핏보면 생뚱맞아보이고 잘 이해가 안가는 대사가 나와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깊었던 대사요.
* 훈: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어요."
그런데 애나가 훈의 편을 들면서 왕징에게 화를 내고, 왜 훈에게 사과를 하지 않느냐고 화를 내지요.
7년전 어느날 왕징이 유부녀인 애나에게 찾아가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가 애나 남편이 이를 알게 되고, 애나 남편은 애나를 폭행하고, 애나는 기절하게 돼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집에 들어간 애나는 집안에 차갑게 죽어있는 남편을 보게 되죠. 아마 남편이 왕징을 죽이겠다고 왕징과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왕징이 애나의 남편을 죽이고 도망갔던게 아닌가 싶어요.(영화의 첫 장면에 얼굴이 멍들고 넋이 나간 애나의 모습을 보면... 애나가 남편을 살인했을거 같지는 않아요. 왕징이 애나의
남편을 죽인 장면이나 명시적인 대사는 없고 그냥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애나가 훈과 시애틀의 시장을 구경하고 나서 벤치에 앉아 얘기하던 중에 "그땐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만큼 좋아했어요" 라고 말하던 장면이 있었어요. 왕징을 사랑했던 애나는 왕징을 위해 대신 살인자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간거 같아요.
그런데 애나가 감옥에 간 사이에 왕징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거예요. 애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말이죠.
이런 애나의 사정을 알고나서 훈을 편들면서 애나가 왕징에게 화냈던 대사, 그리고 왕징의 대답을 보면 이제 이해가 될거예요. (유부녀였던 애나는 왕징의 여자가 아니었던거고, 왕징은 사과 한마디 없었던거고...)
* 애나: "왜 이사람 포크를 썼어요? 당신 게 아니라구요! 그런데 사과도 안하잖아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 왕징: "미... 미안해"
평생 살인범의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하고 7년간 왕징 대신 감옥살이를 한 애나에게, 왕징은 드디어 "미안해"라고 사과를 해요.
(장면 5) 옥자와 훈
* 옥자: "나랑 도망가서 살자, 응?"
왕징이 애나에게 했던 말을 옥자는 훈에게 해요. 그런데 애나에게 사랑에 빠진 훈은 이를 거절해요.
옥자의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요.(훈의 친구가 옥자 남편 얘기를 하며 훈보고 몸 사리면서 잠시 쉬라고 하자, 훈은 "그런거 무서우면 이 일 어떻게 하냐"고 했던걸 보면... 핑계같아요)
그런데 이게 애나와 왕징의 7년전 모습의 데자뷰처럼 느껴져요.
애인으로부터 도망가서 같이 살자는 제안을 받은 애나와 훈, 그리고 질투심과 배신감으로 이성을 상실한 애나의 남편, 그리고 옥자의 남편.
애나는 남편이 죽어서 살인범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되고, 훈은 옥자가 죽어서 살인범 혐의로 감옥에 갈 처지예요.
(옥자는 남편이 죽인걸까요? 아니면 자살을 한걸까요? 전 옥자의 남편이 옥자를 죽이고 훈에게 뒤집어 씌운게 아닌가 싶어요.)
(장면 6) 키스
애나가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훈은 같이 타게 되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버스가 잠깐 휴게소에 정차를 하게 되죠.
그리고 훈은 애나가 출옥하는 날 이곳 휴게소의 카페에서 애나를 기다릴테니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해요.
그리고 2분 27초동안 애나와 훈은 키스를 하게 되죠. 2분 27초...
이 장면을 보면서 저의 숨 쉬는 소리, 침 꼴깍 삼키는 소리만 들렸던거 같아요.
훈이 주는 시계를 계속 돌려주려 했던 애나, 훈이 준 명함을 휴지통에 버렸던 애나, 훈과의 시애틀 데이트 후 돈을 주면서 남자 에스코트와 거래로 끝내려했던 애나, 하지만 훈과의 짧지만 잔잔했던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 애나의 마음도 열렸나봐요. 사랑스럽고 또 간절하게 훈과 키스를 하는걸 보면 말이죠.
애나는... 감옥에 간 훈을, 언제 세상에 나올지 알 수 없는 훈을... 기다리려나요? 몇 번의 늦 가을을 보내야 하려나요?
(장면 7)
옥자의 남편이 사냥개를 데리고 훈을 찾아내서 하는 짧은 대화예요.
* 옥자 남편: "옥자가 너랑 있으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 훈: "그냥 얘기했습니다.(We just talked)"
결국, 사랑은 소통인가봐요. 영화 제목 "만추"처럼 "외로움"에 병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내 얘기를 귀기울이고 들어줄 단 한 사람, 비록 중국어로 얘기해서 알아듣지 못할 망정 고개 끄덕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줄 단 한 사람, 지금 몇 시냐고 시간을 물어봐주고 안부를 물어봐 줄 단 한 사람, 첫 장면에서 왜 나한테 돈을 빌릴 생각을 했냐는 애나의 질문에 "당신이 웃었잖아요"하면서 그걸 "Yes"로 해석할 줄 아는 단 한 사람, 말하지 않아서 표정 속에서 더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단 하사람, 온 몸으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건가봐요.
당신에게는 늦은 가을, 아무 이유없이 "그냥", "애기할 누군가"가 있나요?
없다면, 영화 "만추"를 볼 시간이네요.
즐겁게 감상하세요.
'책이랑 영화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서부 전선 이상없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2022) (0) | 2023.02.26 |
---|---|
[영화] 그린 북 (Green Book) (0) | 2023.02.26 |
[책] "심리학 직장 생활을 도와줘", 박진우 지음, 비지니스맵 출판사 (4) | 2023.01.08 |
[책] "나는 기다립니다..." (다비드 칼리 글, 세르주 블로크 그림, 안수연 옮김, 문학동네) (0) | 2022.12.31 |
[책] 통찰의 시간 (신수정 지음, 알투스 출판사) (5) | 2022.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