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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15 [영화] 그린 마일 (The Green Mile, 1999)
그린 마일 (The Green Mile, 1999)
프랭크 다라본트 (Frank Darabont) 감독/ 각본
스티븐 킹 원작
톰 행크스, 마이클 클라크 덩컨 외 출연

 

영화 그린 마일 (The Green Mile, 1999)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20여년 전에 재미있고 인상깊게 봤었던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과 ‘그린 마일(The Green Mile, 1999)’이 동일한 원작자와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 것은 올 해 초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라는 책을 읽으면서 였습니다. 너무 놀랍지 않나요? 재능있는 소설가와 영화 감독의 만남이 인류에 선사할 수 있는 이런 멋진 선물이라니요!

 

20여년 전에 봤었던 그린 마일 영화는 포스터에 나오는 두 명의 영화 주인공(간수 톰 행크스와 죄수 마이클 클라크 덩컨) 얼굴과 슬펐었다는 느낌만 기억날 뿐이었구요, 저는 그린 마일 영화를 마치 처음보는 것처럼 새롭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파우스트가 “망각”을 두고 신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했던가요?!)

 

(* 주의 사항: 여기서 부터는 그린 마일 영화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스포일러 당하기 싫으시면 여기서부터 읽기를 삼가주시고, 영화를 다 본 후에 읽으시길 권합니다. 저는 분명히 경고 했습니당~ >_<*)

 

“Last Mile” 은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감옥에서 처형대까지 걸어가는 복도를 말한다고 해요. 영화에 나오는 사형수 감옥 E동은 복도가 녹색이어서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걷게 되는 Last Mile을 “Green Mile”이라고 부른데서 이 영화의 제목이 나왔답니다.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7개의 주제로 풀어보았습니다.

 

 

(1)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과  ‘그린 마일(The Green Mile, 1999)’

 

그럼, 시작을 동일 원작에 동일 감독의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으로 열어볼까요?

 

The Shawshank Redemption, The Green Mile

 

‘쇼생크 탈출’과 ‘그린 마일’ 두 영화 모두 감옥, 간수와 죄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1900 년대 초중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은 비슷해요. 

하지만 다른 점도 많이 있어요. ‘쇼생크 탈출’은 리얼리티적이고, 억울한 누명을 쓴 죄수(앤디, 팀 로빈스 분)를 주인공으로 해서 ‘자유(freedom)’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린 마일’은 환타지적인 장면이 여럿 나오고,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간수(폴 에지콤, 톰 행크스 분)를 주인공으로 해서 ‘자비(mercy, kindness)’, 그리고 죄없는 죄수(존 커피, 마이클 클라크 덩컨 분)를 통해서 ‘기적, 죄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2) 죄없는 죄수 John Coffey(J.C.)와 죄없는 어린양 Jesus Christ(J.C.)

 

병든 자를 치유하는 기적의 능력이 있는 존은 자신의 이름이 “커피(Coffee)”와 발음은 같고 스펠링은 다른 “John Coffey(J.C.)” 라고 천천히 또박또박 소개합니다. 이는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J.C.)” 와 같은 이니셜을 염두에 두고 작가가 만든 이름일 것 같아요. 

 

그 당시 가장 천대받던 흑인이었던 존이 감옥에 올 때 사형수로서 “Dead man walking” 이라는 모욕을 당합니다. 말구유에서 가장 낮은 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종교재판에서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는 모욕을 당하며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영화의 주인공 John Coffey와 Jesus Christ 모두 죄는 없지만 죄인(살인, 신성모독)의 신분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존은 다른 사람의 죄를 누명을 쓰고 물뭍은 스펀지를 머리 위에 얹고 감옥에서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머리 위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어린양이 되어 희생됩니다. 

 

존은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며 감방의 복도 불이 항상 켜져있기를 바라고, 전기의자 사형을 당할 때는 어둠이 무섭다면서 두건을 씌우지 말아달라(“Don’t put me in the dark”)고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요. 

 

간수 폴은 사형수 존이 죄가 없음을 알지만 사형을 면하게 할 방법이 없자 괴로워하면서 존에게 물어봐요. 

폴: “나중에 내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났을 때 왜 당신의 기적을 죽였냐고 물어보시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존: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세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 40절)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기적을 행하는 인간 존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위에 비교한 내용을 살펴보면 원작가 스티븐 킹은 존을 묘사할 때 예수님을 염두에 두었을것 같습니다.  

 

 

(3) 선과 악

 

인간의 본성은 선할 걸까요, 아니면 악할 걸까요? 그도 아니면 백지로 태어난 인간이 사회화 과정 속에서 선과 악의 비중이 사후적으로 형성이 되는 것 일까요? (성경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 영화에서 보면 한 인간이 속한 부류가 간수의 신분이건 혹은 죄수의 신분이건 간에 선한 사람도 있고 싸이코 패스, 쏘시오 패스도 섞여 있어요. 특히 이 영화에서 악한 포스를 풀풀 풍기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간수 ‘퍼시’(더그 허치슨 분)와 살인마 죄수 ‘와일드 빌’(샘 록웰 분)이 나와요 (두 명 모두 연기를 너무나 잘 했어요! 둘 중에 한 명이라도 꿈에라도 나타날까봐 무서울 지경이예요). 

 

The Green Mile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모두들 선과 악한 심성 모두를 우리는 가지고 있잖아요. 선과 악 중에서 어느쪽에게 먹이를 주고 북돋아 주느냐가 중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퍼시와 델의 서로 상처주고 상처입히는 과정을 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게(be kind)” 그리고 예의를 갖춰서 대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봐요. 퍼시가 델의 손가락에 골절을 입혔고, 와일드 빌에게 농락을 당하고 바지에 오줌을 싸버린 퍼시를 델은 놀리고, 다시 델에게 모욕당했다고 느낀 퍼시는 델의 사형집행일에 스펀지에 물을 뭍히지 않아서 델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해요. 상대가 그 누구이던지 간에 말과 행동은 예의를 갖춰 친절하게 하고 볼 일이예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 말과 행동이 돌고 돌아서 결국에게 나에게로 향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봐요. 선이든 악이든 전염성이 강한 것 같아요. 

 

퍼시는 간수로서 사형수의 전기의자 사형을 집행을 한 후에 브라이어 리지 정신병원으로 전근을 가기로 했지만, 결국엔 와일드 빌을 권총으로 쏴 죽인 후에 넋이 나가서 정신병자로서 브라이어 리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지요. 뿌린대로 거둔다고 했던가요! 맨 정신(?)으로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다면 약자인 환자들을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꼈을 것 같은 퍼시를 알기에 존이 미리 손을 쓴 거 겠지요? (존은 인류를 구원할 수도, 죽은 이를 되살릴 수는 없지만, 죄와 악을 벌하고 정신병원 환자들에 대한 배려의 선물을 주고 떠납니다.)

 

 

(4) 백인과 흑인

 

영화는 아직 유색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다보니 흑인 이란 이유만으로 “분명히 두 여자 아이들을 죽인 살인범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범죄 혐의를 받고,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사형 판결을 받게 됩니다. 간수 폴은 존의 성품을 알아보고 존의 변호사를 찾아가 사건에 대해 물어보는데요, 이때 존의 변호사가 했던 말이 1930년대 남부 지역의 백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흑인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The Green Mile

 

존 커피의 변호사 버트: “저희 집에는 잡종 개가 한마리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개가 제 아들을 물어서 아들은 한쪽 눈을 실명했어요. 흑인은 잡종개와 같아서 주인이랑 잘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해서 주인을 물을지 몰라요. 접종 개가 제 아들을 물었을 때 저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총으로 개의 머리를 쏴버렸지요” (기억이 정확하지 않으므로 실제 대사는 조금 다를 것임. 대략 이런 내용이었음.)

 

존이 두 여자 아이를 껴안고 울부 짖으면서 "I couldn't help it!" 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예요. 첫째는 말 그대로 "나는 이 두 여자 아이들을 도와줄(help) 수 없었습니다"의 뜻이고, 이게 바로 존 커피가 하고자 했던 말이예요. 두번째로는 "나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는) 어쩔 수(avoid) 없었습니다." 라고도 해석할 수 있어요. 두 어린 여자아이의 아빠와 백인 보안관, 주민들은 아마도 이 두번째 의미로 존 커피가 울면서 말한 "I couldn't help it"을 받아들였을 거예요. 만약 존 커피가 백인이었고, 깨끗한 옷에 말쑥한 외모였다면 어땠을까요? 

 

 

(5) 죄와 벌

 

영화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교도관이 근엄하게 선포해요. “법에 기반하여 저명하고 권위있는 재판관 000와 배심원들의 정의로운 재판 결과에 의해 죄수 000 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으며, 때가 되었기에 사형을 집행합니다.” 라구요. 뭔가 엄청난 권위와 신뢰 하에 판결이 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잖아요. 

법은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에 의해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여 만들어지고 또 시대에 따라 변경이 됩니다. 사형제도의 범죄 예방 효과, 윤리적이고 인도적인 측면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거우며, 국가별로도 사형제도의 존치와 집행 여부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The Green Mile

 

이 영화에서는 전기 의자 사형집행 장소에 피해자와 관련된 사람들이 참관인으로서 전체 사형집행 과정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히 델이 사형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델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에서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의 죄를 되돌리고 싶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정확한 대사는 아님. 대략 이런 내용) 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피해자 가족은 가해자 델이 처참한 고통 속에 죽어가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리고 델은 퍼시가 스펀지에 물을 적시지 않은 채로 사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 속에 죽어가게 되고, 참관인들은 아비규환이 되어 구토를 하면서 처형장을 빠져나가려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죄인이 있고, 가해자와 다를 바 없는 잔인성을 표출하는 피해자 가족들이 있으며, 법의 이름으로 사형수를 사형하는 국가의 체제가 있습니다. 죄가 없었던 존 커피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되돌릴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죽음의 세계로 건너갔습니다. 

 

죄와 벌, 용서와 구원은 종교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일까요? 

 

 

(6) 죽음과 영생

 

죽음은 사람에게 있어 저주일까요? 그리고 영생은 축복일까요? 이 영화에서 폴은 존으로부터 신비로운 능력을 전달받아서 108세가 되었는데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서커스를 할 줄 아는 쥐 징글스도 64년이 되었는데도 살아있는 데요, 쥐의 수명이 10년이 안되는 것을 고려하먄 폴이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더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병장수”를 누리고 있는 폴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 자식, 그리고 요양원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죽음을 맞아 곁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계속 마주해야 한다며 “죄없는 존을 죽인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영생은 저주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의미있게 하고 또 “중년의 위기” 이후 후반기의 삶을 설계할 때 나침반이 되어주는 것을 꼽으라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존은 자신이 죄가 없지만 사형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해요. 힘들고 지친 영혼에게 죽음은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하나봅니다. 이 장면 너무 슬퍼요.  

 

존 커피: “전 이제 끝내고 싶어요 전 지쳤어요. 비맞은 참새마냥 홀로 떠도는 것도 지쳤고, 인생을 나눌 친구가 없는 것에 지쳤고, 사람들의 추한 작태를 보는 것에 특히 지쳤고, 매일 세상속에서 느끼고 듣는 고통속에서 지쳤고, 그래서 항상 머리속에서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아요."

 

 

(7) 지옥과 천국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는 지옥인 걸까요? 우리가 종교에 귀의해서 구원받아야만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일까요? 

폴이 존에게 사형 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봐요. 이때 존은 한평생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해요. 존과 간수들이 감옥에서 같이 본 영화가 바로 이 영화의 처음 시작 부분에서 요양원에서 노인 폴이 친구 일레인과 함께 우연히 TV에서 보고나서 오열했던 바로 그 영화예요. 

 

뮤지컬 영화 “톱 햇(Top Hat, 1935)” 에서는 사랑에 빠진 연인이 춤을 추면서 “당신과 함께 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고 노래하는 장면이 스크린에 비추고 있고, 사형을 앞둔 존 커피도 역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지금 여기가 천국이예요”라고 말해요. 

 

Musical "Top Hat"
The Green Mile, John Coffey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1) 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이 언제, 어디에 계시든 “바로 지금 여기가 천국” 이길 소원합니다. 

 

 

상영 시간이 3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3시간 동안 슬프지만 마음 따뜻해지고 싶은 분에게 영화 그린 마일을 권합니다. 또 누가 알겠어요?  그린 마일 영화를 보면서 존 커피가 되뇌었던 "바로 지금 여기가 천국이네요!" 가 여러분의 입에서 나올런지요.

 

비록 코로나로 인해서 밖에 잘 나가지는 못한다지만, 집에 있으면서 영화와 함께 나날이 행복하시길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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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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